“가늘게 내리는 비”라서 ‘가랑비’입니다. 가랑비보다 더 가늘게 내
리는 비는 ‘이슬비’라고 해요. 똑같이 가늘게 내리는 비이지만,
바람이 없는 날 드문드문 조용히 내리는 비는 ‘보슬비’입니다.
‘실비’는 “실처럼 내리는 비”예요.
가늘구나 하고 느끼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를 테니, 누군가는 가랑비라
말해도 누군가한테는 실비일 수 있어요. 가늘게 내리는 느낌을 살려서
‘실 오라기비’나‘실오리비’처럼 새롭게 이름을 붙여도 됩니다.
최종규 저(著) 《새로 쓰는 비슷한 말 꾸러미 사전》
(철수와 영희, 17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베두인들에게는 ‘낙타 를 지칭하는 낱말이 천 가지도 넘는다고 합니다.
이누이트들에게는 ‘눈’ 의 종류를 구별하는 어휘가 수십 가지이고,
스콜이 매일매일 퍼붓는 적도 근처의 어느 나라엔 ‘소나기’ 를 뜻하는
낱말들이 셀 수 없이 많다고 합니다.
언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에서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The limits of my language
are the limits of my world)” 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언어
만큼의 세상을 봅니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지성의 한계이고, 생각의
한계입니다. 사람은 언어만큼 생각을 합니다. ‘소나기’ 하나만 아는
사람은 가랑비, 이슬비, 보슬비, 실오리비를 말하는 사람의 감성과 상
상력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주 반복해서 들었던 말로 자신의
세계를 하나하나 만들어갑니다. 언어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언어의 한계를 극복해 인식의
한계도 극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이
세계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내 세계의 한계를 키우려면 무엇보다도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바꾸어야 합니다.
‘말’ 중의 최고의 말은 믿음의 말, 축복의 말, 사랑의 말입니다.
말에도 온도가 있습니다. 너무 뜨거워도, 얼음처럼 차가워도 안 됩니다.
성경은, 대화의 기술을 높여 능수 능란한 말, 촌철살인 같이 꼼짝 못
하게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말, 살리는 말, 따뜻한 말을 하는 사람을 말을 잘하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잠16:24)
<강남 비전교회 / 한재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