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는 말을 기다리게 하는 것보다 미안한 일은 없다.” 김은주 저(著) 《1cm》 (허밍버드, 163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연애할 땐 “사랑해”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살다 보면 “미안해” 없 이는 못 삽니다. 사랑해는 기념일에 쓰고, 미안해는 한 달에 한 번은 써야 합니다. 결혼은 매일 “사랑해”를 다짐하는 일보다 매일 “미안 해”를 연습하는 일입니다. 사랑해는 꽃을 피우지만 미안해는 뿌리를 내리게 합니다. “사랑해”는 1등 신랑감이 될 수 있지만 “미안해”는 평생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을 만듭니다. 사랑은 당연히 가정의 꽃입니다. 그런데 미안해는 그 꽃이 자라기 위한 비와 햇살입니다. “사랑해”는 영화 대사 같고, “미안해”는 살림살이입니다. 사랑해는 사랑의 시작이고, 미안해는 사랑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사랑해”로 시작해서 “미안해”로 살아남습니다. “사랑해”라는 말은 예쁘고 꽃다발 같고, 햇살 같고, 기분 좋은 초콜릿 같습니다. “미안해”라는 말은 비 오는 날 우산 같은 말이고, 겨울 언 손에 장갑처럼 다가온 말입니다. 하마는 입을 크게 벌리지만 사과는 안 합니다. 그래서 친구가 별로 없 습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사람은 결핍에 사랑을 느낀다. 미완성,약점, 부족함을 느끼면 본능 적으로 감싸려고 한다. 반면에 빈틈이 없이 완벽한 사람에게는 인간미를 느끼지 못해서 경계심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회사도 마찬가지여서 조직 구성원들이 리더를 비롯한 동료들의 단점을 알고 나면 오히려 안심을 한다.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는 안심 감이 이 사람을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만든다.” 세토 카즈노부 저(著) 신찬 역(譯) 《자신을 죽이지 말고 무기로 삼아라》 (홍익출판 미디어그룹,165-166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틈 하나 없이 완벽했습니다. 그 벽을 ‘인간’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틈이 생긴 날, 그는 울었습니다. 비로소 사람이 되었습니다. 틈이 없다면 햇살도, 실수도 못 들어옵니다. 그러면 웃을 일도 없습니 다. 인공지능에는 틈이 없습니다. 바둑을 두어도 져주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상처도 없고, 그 상처에 피어나는 시도 없습니다. 완벽하지만 비를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인공지능은 항상 옳았고, 그래서 한 번도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틈이 있는 사람, 자신이 죄 많고 치유를 받아야 할 존재,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고 인식할 때 치유가 가능합니다. 자신이 건강하고 의인
“그리스도의 임재는 포착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가까이 계셨다가도 갑자기 사라지시는 것이 부활 직후의 모습과 조금 비슷하다. 가끔은 숨겨 둔 재주를 부리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분은 슬픈 기색으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다가 빵을 자르는 순간 감쪽같이 사라 지셨다. 그분은 방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지셨 다. 마지막으로 그분은 제자들이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가운데 공중 부양을 하듯 구름 속으로 올라가셨다. 그분의 임재는 일정하지 않은 듯 하지만 그분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시고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다.” 켄 가이어 저(著) 최요한 역(譯) 《폭풍 속의 주님》 (두란노, 147-148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며 낙심하여 엠마오로 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들과 같이 길을 걸으며 성경을 풀어 주시자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2) 엠마오 제자들은 예수님을 집에 초청하였고, 예수님이
아름다워라 찢어진 문틈으로 보는 은하수 일본의 전통 단시(短詩) 하이쿠의 대가 잇사의 시입니다. 손가락 하나에도 쉽게 찢기는 장지문의 불규칙한 구멍으로 광대무변의 은하수가 내다보입니다. 깨진 틈은 흠이 아닙니다. 깨진 틈이 있어야 그 사이로 빛이 들어옵니다. 한 도공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그릇들을 빚어 시장에 내다 팔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매끈하고 화려한 도자기를 골랐습니다. 가장 구석에 금이 간 질그릇이 있었습니다. 한쪽은 깨져 테이프로 붙어 있었고, 빛 깔도 흐릿하고 볼품없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난 걸까…아무 데도 못 쓰일 거야.” 금 간 질그릇은 그렇게 스스로를 탓하며 숨죽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공이 조용히 그 질그릇을 들어 밤길을 걸어가는 한 노인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 안엔 조그만 촛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금이 간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둔 길을 걷던 사람들은 그 빛을 따라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길을 찾았습니다. 질그릇은 깨달았습니다. “나의 금 간 자리는, 빛이 흘러나오는 통로였구나.” 완전하지 않아도, 주님의 빛을 품으면 우리는 길을 밝히는 그릇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사람들 사이에 / 사이가 있었다 / 그 사이에 있고 싶었다 / 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 / 시인 박덕규의 시 「사이」입니다. 정현종 시인의 유명한 시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섬」을 패러디한 시입니다.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습니다. 아무 편도 아니라고 하자, 양편에서 돌을 던집니다. 괜찮습니다. 아무 편도 아닌 것도 좋은 의견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 편이 있었고, 로마인 편이 있었 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이에서 아무 편도 아니고 예수님 편이었 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 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행11:26) <강남 비전교회 / 한재욱 목사>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을 하는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조선 영조 때 김천택이 엮은 「청구영언」에 나오는 작가 미상의 시조 입니다. 말字를 9번 반복하면서 구시화문(口是禍門) “입이 재앙을 부른다.”는 교훈을 줍니다. ‘설화’(舌禍)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말 한마디 잘못하여 화를 입은 선비들이 많습니다. 그런 재앙을 일컫는 말입니다. ‘필화’(筆禍) 라는 말도 있습니다. ‘혀’뿐만이 아니라 ‘붓’도 무 서운 것이어서 붓 한 번 잘못 놀렸다가 패가망신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 시대는 인터넷,SNS의 홍수입니다. 잘못된 말과 글이 난무하는 시대 입니다. 혀는 뼈가 없지만 사람을 부러뜨리고, 글은 잉크로 쓰지만 인 생을 지울 수 있습니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지만, 말 한 마디에 천 명한테 욕도 먹습니다. SNS에 한 줄 썼다가 삼대가 털리 고, 단톡방에 이모티콘 하나 잘못 날렸다가 인간관계가 로그아웃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말’에 대한 교훈이 차고 넘칩니다. 하나님께 여러 가지 기도를 드리지만 ‘말을 위한 기도’는 반드시 드 려야 하는 기도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