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창 위천, "영남 제일의 동천, 수승대 현수교"> 김광부 기자
“나답게 산다는 게 뭔지(중략). 남들을 배려하지 않는,‘우리’가
없는 ‘나다움’이라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나라는 사람은 ‘우리’라는 관계 안에 있는데,
과연 나만 나답게 살아도 될까? 나의 소신만 지켜도 되는 것일까?”
최대호 저(著) 《솔직히 말하자면 괜찮지 않아》(프로작북스, 131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경남 거창 위천, "영남 제일의 동천, 수승대 현수교"> 김광부 기자
타인과 소통하지 않는 삶은 없습니다. ‘나’는 ‘우리’라는 무리 속의
‘나’이지, 저 혼자 있는 ‘나’가 아닙니다. ‘우리’가 있기에 ‘나’
는 나다움에 대해 더욱 고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없었다면
내가 생각한 대로 살겠다고,나답게 살겠다는 결심하는 자체가 존재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하여 나는 나로서 살아야 하지만, 우리를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경남 거창 위천, "수승대 구연 서원(관수루)"> 김광부 기자
《논어(論語》의 ‘자로’(子路)편 23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
“군자는 어울리되 동화되지 않고, 소인은 쉽게 동화되면서도 화합하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경남 거창 위천, "수승대 구연 서원(관수루)"> 김광부 기자
‘내’중심이 있으면서도 이웃과 어울릴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나’도 쉽게 잃어버리면서도 이웃과도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남 거창 위천, "수승대 구연 서원(관수루)"> 김광부 기자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의와 상념에만 집중한 사람들입니다.
반면 바울 사도는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어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였습니다.
<경남 거창 위천, "수승대 구연 서원(관수루)"> 김광부 기자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
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고전9:22)
<경건 메일 / 한재욱 목사>
<경남 거창 위천, "수승대 구연 서원(관수루)"> 김광부 기자
<경남 거창 위천, "수승대 구연 서원(관수루)"> 김광부 기자
<경남 거창 위천, "영남 제일의 동천, 수승대 징검다리"> 김광부 기자
<경남 거창 위천, "영남 제일의 동천, 수승대 풍경"> 김광부 기자
<경남 거창 위천, "수승대 구연 서원(관수루)"> 김광부 기자
<경남 거창 위천, "수승대 관광지 풍경"> 김광부 기자
<경남 거창 위천, "수승대 관광지 풍경"> 김광부 기자
<경남 거창 위천, "수승대 관광지 조형물"> 김광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