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에겐 ‘빨, 주, 노, 초,파, 남,보’ 일곱 색깔이 정설이 죠. 그런데 나라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미국 등 영어권 사람들은 남 색을 제외한 ‘빨,주, 노,초,파,보’ 여섯 가지로 압니다. 네덜란 드어를 쓰는 나라에서는 ‘빨,주,노,초,파’, 멕시코 원주민 마야 족은 ‘흑,백,빨, 노, 파’순서로 다섯 가지를 듭니다. 이밖에 아프 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무지개를 두 세 가지 색으로 인식한다네요.” 한은 저(著) 《디렉터의 노트》 (플로우, 2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정설’이란 말 속에는 언제나 시대와 문화의 한계가 들어 있습니다. 누군가의 기준에서는 일곱 가지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다섯 가지가 정상일 수 있습니다. 무지개의 색이 다르다고 무지개가 달라지는 건 아 닙니다. 오히려 그 차이 덕분에 인간의 시선은 풍요로워집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세상은 단조로운 한 색이 아니 라, 셀 수 없이 다양한 빛으로 가득한 세상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신 앙의 색깔과 문화적 표현들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무 한한 풍성하심을 깨닫게 하는 귀한 통로가 됩니다. 신앙의 성숙은 나의 일곱 색깔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
“‘뇌’ 관이 달린 선‘물’을 뇌물이라고 한다.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선물과 뇌물의 차이: ‘선’ 의로 받으면 선물, (받고 나서) 고 ‘뇌’하게 되면 뇌물.” 이상준 저(著) 《고품격 유머》 (다산북스, 140쪽) 중에 나오는 구절 입니다. 선물과 뇌물에 대해 이런 유머도 있습니다. “서서 받으면 선물, 앉아서 받으면 뇌물. 웃고 받으면 선물, 그냥 받으면 뇌물. 받고 악수하면 선물,받고 악수 안 하면 뇌물. 받고 잠이 잘 오면 선물, 받고 잠을 설치면 뇌물. 받고 기대함이 없으면 선물이지만,받고 기대함이 있으면 뇌물.” 선물의 근원은 하나님이고,뇌물의 근원은 마귀입니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 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23:8). <강남 비전교회 / 한재욱 목사>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意味)와 감미(甘味)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 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사실 감정은 일찍부터 가질 수 있는 거다),경험 이기 때문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저(著) 문현미 역(譯) 《말테의 수기》 (민음사, 26-27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시는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한평생을 통째로 살아낸 사람의 언어입니 다. 따라서 깊은 삶이 없으면, 깊은 언어도 없습니다. 시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한평생을 기다립니다. 수많은 도시의 골목을 걸어야 하고, 낯선 사람들의 눈빛을 마주해야 합니다. 새벽 이슬 맺힌 꽃잎의 떨림을 알아야 하고, 새들이 하늘을 가르는 궤적을 느껴야 합니 다. 감정은 쉽게 오지만 경험은 천천히 쌓입니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말이 시가 됩니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도시들,사람들,그리고 사물들을 보아야만 한다. 동물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새들이 어떻게 나는지 느 껴야 하며, 작은 꽃들이 아침에 피어날 때의 몸짓을 알아야 한다.”(27쪽) 설교도 그러합니다. 좋은 시는
“‘세속적’인 책에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것이다(중략). 성령의 감화를 받은 영혼들의 책을 읽으면 되는데, 굳이 무신론자의 글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나름 정당한 질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진리의 근원이자 기준이라면 진리는 다 그분의 것이다. 만물에 창조주의 흔적이 있다고 믿는다면 철학, 전기 문학,생물학, 소설 등 창조 세계를 세밀히 분석하는 책은 모두 진리를 조명하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브랫 맥크라켄 저(著) 윤상필 역(譯) 《지혜 피라미드》 (성서유니온, 170-171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3:16) 하나님은 세상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교회 안에만 머 물지 않고, 세상 속으로 흘러들었습니다. 복음 중심의 신앙을 전 세계에 온오프라인으로 전파하기 위해 팀 켈러 목사님과 카슨 교수님이 창립한 TGC(The Gospel Coalition)의 선임편 집자 브랫 맥크라켄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면 진리는 다 그분의 것이다.” 무신론자의 책은 인간의 불안과 공허를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것은
“서울 사는 사람은 언제나 전원의 목가적 풍광을 사모한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가면 며칠이 못 되어 다시 도회의 번화한 풍광과 따뜻한 커피 한잔이 그립게 마련이다. 이에 대한 처방은 무엇일까?” 정민 저(著) 《한시 미학 산책》(솔, 122-123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은 전원의 평화롭고 목가적인 삶을 동경합니다. 하지만 막상 전원에 가보면, 며칠 지나지 않아 도시의 편리함, 활기,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상징되는 세련된 문화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일본 에도시대의 바쇼의 시는 이 주제를 한층 더 깊이 있게 만듭니다. 가을 십 년에 도리어 에도(江戶) 쪽을 가리키는 고향 바쇼는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타지였던 에도(현재의 도쿄)에서 생활 했습니다. 이제 그곳을 떠나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그의 마음은 오히려 자신이 떠나온 도시 ‘에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향이 라는 개념이 단순히 태어난 장소(birthplace)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곳, 정서적 유대감이 형성된 곳(hometown)으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작가 김은주는 행복이 가장 싫어하는 세 단어가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말고
좀 비대한 목사님이 여윈 목사님을 향하여 “목사가 저렇게 말라서야 무슨 은혜가 있겠나! 목사가 자기 마음에도 은혜가 없어서 저렇게 삐삐 말랐으니 어떻게 되겠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윈 목사님이 하시는 말이 “세상에 이렇게 죄악된 것을 알면서도 살이 피둥피둥 찌 다니 어디 저게 목사인가!” 하고 나오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둘 다 옳은 말입니다. 곽선희 저(著) 《이 세대를 보라》(계몽문화사, 295쪽) 중에 나오는 구 절입니다. 어느 교회 권사님 두 분이 있었습니다. 한 분은 새벽마다 열심히 나오는 분이었고, 또 한 분은 교회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하는 분이었습니다. 새벽기도에 늘 빠지지 않는 권사님이 말했습니다. “기도는 안 하고 청소만 한다고 은혜가 되겠어요? 말씀으로 무장해야 지, 걸레로 무장하면 뭐합니까.” 그러자 청소 담당 권사님이 대답했습니다. “기도만 하고 손 하나 까딱 안 하면서 무슨 믿음이 있대요? 믿음은 손 끝에서 나오는 법이지.” 두 말 다 옳았습니다. 기도도 섬김도 다 필요합니다. 문제는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