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者도 아닌 죽은 者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시인 오규원의 시 「죽고 난 뒤의 팬티」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가벼운 교통사고 후, 시속 80킬로만 되어도 앞 좌석을 움켜쥐며 “오늘 깨끗한 팬티를 입었나?”를 걱정한다는 시인의 고백은 우리를 웃게 만 듭니다. 죽음보다도 죽음 뒤에 남을 민망함을 걱정하는 시인. 죽음이 라는 거대한 소멸 앞에서 고작 속옷의 청결을 걱정하다니요. 하지만 이 우스운 고백 속에 우리의 민낯이 있습니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도 남 에게 보일 내 모습을 걱정하는, 타인의 시선에 묶인 존재들입니다. ‘죽고 난 뒤의 팬티’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순간, 세상에 남겨질 내 마지막 모습, 그 부끄러움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시인은 죽고 난 뒤 수습될 육신의 부끄러움을 염려했지만, 그리스도인은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내 육신의
가슴에 굵은 못을 박고 사는 사람들이 생애가 저물어가도록 그 못을 차마 뽑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기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을 거기 걸어 놓았기 때문이다 시인 윤효의 시 「못」입니다. 누구에게나 가슴에 그런 못이 있습니다. 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이름, 지우고 싶지만 지워지지 않는 상처, 떠나보냈지만 여전히 가슴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억. 사람들은 종종 그 못을 뽑지 못한 채 조심조심 살아갑니다. 아프다는 걸 알면서도 그 못을 뽑아버리면 내 생의 가장 뜨거웠던 순간까지 함께 사라져버릴까 해서입니다. 상처를 미워하면서도 그 상처가 품고 있는 뜨거움을 사랑합니다. 그 못은 고통의 흔적이지만, 한때 정말로 울었고, 정말로 살아 있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못이 아픈 만큼, 그 자리에 걸어 두고 싶었던 마 음도 깊었습니다. 아직도 마음에 박힌 못이 있다면, 그것은 뜨겁게 살 아온 흔적입니다. 이 세상 최고의 못은 십자가의 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못을 피하지 않으시고 온몸으로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붉은 사랑을 완성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사랑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6:17b) 그의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저(著) 문현미 역(譯) 《말테의 수기》 (민음사, 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주인공 말테가 파리라는 도시를 바라보며 느끼는 실존적 공 포와 내면의 낯섦을 가장 강렬하게 드러내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스물 여덟 살의 청년 시인 릴케가 파리에 도착해 느낀 첫 감각은 공포였습니 다. 생명을 찾아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아이러니하 게도 죽음이었습니다. 릴케가 말한 ‘죽음’은 육체의 소멸이 아닙니다. 더 깊은 차원의 죽음, 영혼이 서서히 무감각해지는 죽음이었습니다. 타 인의 고통에 무뎌지고, 아침 햇살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사랑하는 이의 눈을 제대로 바라볼 여유조차 잃어버리는 상태. 숨은 쉬 지만 살아 있지 않은, 생존하지만 생명이 없는 그런 상태 말입니다. 도시는 더 잘 살아보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두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서두르고, 더 높이 오르기 위해 애씁니다. 도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약속합니다.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고, 더 많이 가지면 안 정될 것이고, 더 높이 올라가면
“남이 가진 것을 보고 나면 그제야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깨닫게 되곤 합니다. 그러고는 그것을 갖기 위해 상대와의 경쟁의식에 사로잡 히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이 그것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상대를 시샘하거나 질투하게 됩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열등감이라는 녀 석이 마음속에 피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최복현 저(著) 《스토리 플러스》 (글램북스, 83쪽) 중에 나오는 구절 입니다. 열등감은 하나님이 설계하신 본래의 모습(Original Design)이 아니라, 타락의 결과(Consequence of the Fall)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창1:27)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적 인간론의 핵심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그의 능력, 외모, 성과, 혹은 타인과의 비 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타락 이전에 수치심이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5). 그들은 하나님 및 서로와 완전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금한 선악
“혼자이면서도, 혼자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늘고 있다(중략). 개인의 자율적 삶(1)을 기반으로, 경제적 심리적 육체적 부담을 덜기 위해 유 연한 연결감(0.5)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트랜드 코 리아 2026』은 이러한 가구 형태를 ‘1.5가구’라 명명한다. 1은 침해 불가한 자율성을, 0.5는 선택적 연결감을 지칭한다. 1.5는 1보다는 크고 2보다는 작은 수다. 단순한 1인 가구를 넘어서면서도, 그렇다고 다인 가구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새로운 가구의 모습이다.” 김난도 외 다수 공저(共著) 《트렌드 코리아 2026》 (미래의 창, 34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1.5 가구는 가족 형태의 파괴와 재구성입니다. 전통적인 4인 가족(1.0) 도 아니고, 고립된 1인 가구(2.0)도 아닌, 그 중간 지점인 ‘1.5가구’ 가 새로운 주거 표준으로 부상합니다. 이는 “혼자 살고 싶지만 외로운 건 싫고, 같이 살고 싶지만 간섭받기는 싫은” 현대인의 욕구를 해결 하는 대안입니다. 치솟는 주거비용을 분담하기 위한 경제적 선택인 동시 에, 개인의 자유를 침해받지 않으려는 라이프스타일의 반영입니다. 청년들은 비싼 주거비를 나누고 외로움을 덜기
“후진은 전진의 첫걸음에 불과하며 전진은 또 다른 후진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밤과 낮, 끝과 시작, 들숨과 날숨, 듣기와 말하기처럼 전진과 후진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도는 두 마리 뱀과 같다(중략). 전진은 좋은 것이고 후진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은 그릇된 것이다. 그 러한 어리석음을 경계하여 옛 사람들은 양음(陽陰)이라 하지 않고 음양 (陰陽)이라 하였으며, 시종(始終)이라 하지 않고 종시(終始)라고 하였 던 것이다.” 이성복 저(著)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문학동네, 229-23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흔히 ‘전진’은 좋은 것이고 ‘후진’은 나쁜 것, 앞으로 가는 사람은 성장하고 있는 사람, 뒤로 물러나는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라는 이분법 속에 자신과 타인을 가둡니다. 멈춤, 흔들림, 후퇴, 방황은 언 제나 부끄러운 이름표였습니다. 그러나 . 시인이 말하듯, 전진과 후진은 서로의 꼬리를 문 두 마리의 뱀입니다. 후진은 실패가 아니라 전진만을 향해 달리던 속도를 낮춰 삶의 균형을 되찾는 기회입니다. 물러섬은 망 설임이 아니라 사유의 여백이고, 돌이켜 보는 것은 성숙의 다른 표현 입니다. 하나님은 멈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