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은 태어날 때, 이 세상에 존재한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았다. 인생을 그처럼 좋은 조건을 가지고 시작한 사람은 없다. 태어나서 보니 나라가 자기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지혜를 주었다. 그러나 솔로몬 인생의 끝은 좋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솔로몬을 “성경에 나오는 가장 지혜로운 바보”라고 했다. 지혜로운 바보이든, 멍청한 바보이든 바보는 바보다. 셰익스피어는 “끝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다(All is well that ends well)"라고 했다. 인생의 끝이 좋은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우리 인생의 시작은 내가 선택할 수 없었고, 지금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인생의 끝맺음을 잘하는 것이다. 이런 심리학 실험이 있다.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첫 번째에는 아주 차가운 물에 4분간 손을 담그게 했다. 그리고 두 번째에는 8분간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게 한 후 2분간 미지근한 물에 손을 담그게 했다. 두 실험을 끝낸 후, 사람들에게 실험을 다시 한다면 두 실험 중 어떤 실험을 다시 하고 싶은지 물었다. 실험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차가운 고통의 시간이 두 배나 길었
예배 장소는 특별한가? 중학교 1학년 때, 교회 다니지 않는 동네 친구를 교회에 데려간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예배당 의자에 앉아 있다가 예배가 시작되자 10분도 못 되어 예배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중에 그 친구에게 왜 도망치듯 나갔는지 물었는데, 무서워서 계속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았던 그 친구가 예배 장소를 무심하고 소흘히 여기는 교인들 보다 신앙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배 장소에 왔다고 우리에게 없었던 것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 우리가 가져간 것을 더욱 강력하게 만든다. 구약성경 사무엘서에 보면 엘가나의 관대한 성품은 예배 장소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를 비난하거나 멀리하는 대신 한나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려고 세심한 배려를 했다. 그러나 브닌나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옹졸한 마음과 야비한 마음이 더욱 드러나 남편의 행동을 빌미로 한나를 더욱 괴롭혔다. 종교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하게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최악의 행동을 하게 한다. 실로(예배장소가 엘가나의 관대한 성품을 불러일으켰지만, 브닌나 안에 있는 비열함을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릴 때 저들 나름대로 전형적인 메시아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었다. 그 메시아에 대한 개념을 확고히 하는 데 현저한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이 있다면, 한 사람은 유대 민족의 영웅 마카베우스의 유다(Judas Maccabeus)이고 한 사람은 침례 요한이다. 그리스 제국이 세력을 넓히면서 이질적인 여러 문화를 흡수하는 과정을 헬레니즘화(hellenisation)라고 하는데 이것은 속국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정체성을 빼앗아 그리스 문화에 젖어 들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스라엘에서의 헬레니즘화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젊은 히브리인들은 더 세련되어 보이는 그리스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히브리인들만의 독특한 문화적 요소를 포기했고, 급기야 헬레니즘화는 유대교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인들은 이전의 침략자들처럼 유대교를 탄압하거나 금지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유대교는 구식이고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하도록 했고 신앙을 지킨 열심 있는 소수에 대해서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세대 인물들이라고 여기고 방관했다. 그렇게 하여 유대교가 쇠퇴하면서 거의 소멸하여 가던 중에 알렉산더의 후계자 중 한 사람 셀루시드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