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 해양 머드 박람회, "해양머드 체험관 풍경"> 김광부 @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조총이 소개되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임진왜란이 어려운 싸움으로 확대된 것도
조선이 군사정보의 중요성을 소홀히 한 예이다.”
최중경 저(著)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 (한울, 74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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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3년 일본 다네가시마에 표류한 포르투갈인에게서 조총을 처음 얻었을
때 그 위력을 알아본 다네가시마 사람들은 영락전 2,000필을 지불하고
조총 2정을 양도받았습니다. 당시 지불한 영락전의 가치는 지금의 물
가로 10억 원 정도라고 하니,1정당 5억 원이나 준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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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그 후 수년에 걸친 시행착오를 거쳐 조총을 만들어내서 전국 시
대의 실전 투입 경험을 통해 최적화 전술을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 조총이 전래된 지 12년 되던 1555년,일본인 평장친(平長親)은
당시 조선의 임금이던 명종에게 조총을 조정에 바치고 제작기술을 전수
하겠다고 제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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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총 만드는 데 쓸 철이 없다는 이유로
명종의 반대로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안 쓰고 뒹구는 종을 녹여 쓰
자는 일부 신하들의 건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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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개전 3년 전인 1589년 선조 때에는 대마도주인 소 요시토시
(宗義智)가 통신사를 일본에 보낼 것을 청하면서 최신식 조총을 예물로
조선 조정에 바쳤지만, 아무런 관심 없이 창고에 처박아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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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임진왜란 때, 조총을 앞세운 왜군의 공격에 조선은 속절없이
무너져 갔습니다. 임진왜란 전 일본은 전국시대를 맞아 수많은 전투 전
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총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200년간 전쟁이 없었습니다. 평화의 시기 속에서 조총을 보는
안목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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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풍지대(無風地帶)가 다 좋은 것만은 아니고, 고난이 다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는 캐나다 록키산맥의 단풍나무는 명품
바이올린의 재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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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는 햇빛과 비가 어우러질 때 만들어
집니다. 늘 날씨가 좋으면 사막이 되고, 태풍이 없으면 바다가 썩게
됩니다. 신앙인도 고난 속에서 주님의 율례를 배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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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경건 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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