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절망 속에서 헤어
나지 못했다(중략). 자신에게는 도무지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중략) 분명 카이사르는 인간이었고 따라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중략) 나에게는 전혀 다른 문제다.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건 도
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레프 니꼴라예비치 똘스또이 저(著) 이강은 역(譯)
《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 71-7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삼단논법을 배웠습니다.‘모든 사람은 죽는다,소크라테스는 사
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해당될 때, ‘나도 사람이다,모든 사람은 죽는
다,그러므로 나도 죽는다’는 것은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사람을 가리켜 죽음 앞에 선 존재라고 하며, 사람에
대한 이해를 죽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죽음 앞에 선 존재
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죽음으로의 선구(先驅)’라고 표현했습니다.
죽음을 진짜 생각해 보는 것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줍니다. 죽음을 직시
하기 전엔 결코 몰랐던 삶의 소중함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좋은 삶이 좋은 죽음을 이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좋은 죽음이
좋은 삶을 이끕니다. 숙제를 하지 않은 학생은 축구가 아무리 즐거워도,
전반전만 즐거울 뿐입니다. 후반전, 아니 종료가 가까울수록 불안합니
다. 웰 빙(well being)은 웰 다잉 (well dying) 속에서 나옵니다.
카르페디엠(현실을 즐겨라)은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속에서 나
옵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
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전12:1,2) <경건 메일>